보도자료
에너지 안보와 석유산업의 당면과제
안병원 (대한석유협회 회장)
계절이 어느덧 봄을 지나 여름의 문턱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혹독한 추위를 견디어 낸 만물은 이제 자연이 주는 선물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잎이 소생하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유산업을 둘러싼 경영환경은 계절이 주는 생기를 느끼기에는 이른 것 같습니다. 저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 개시된 직후인 지난 3월 24일 석유협회장에 취임하였습니다. 당시 석유는 대내외적으로 뉴스의 초점이었고, 석유가격은 우리나라 경제의 향방을 좌우할변수로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정부 및 정유업계는 비상대책반을 가동하는등 석유의 안정공급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고, 전략물자로서 또한 현대 산업사회의 혈액으로서 석유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피부로 느끼는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석유협회장이라는 막중한 자리를 맡게 돼 큰 책임을 절감하였습니다.
작금의 국내 석유산업은 맡은 바 역할에 비해 처한 주변 환경이 열악하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2년간 연속 적자를 낸 후 지난해 가까스로 흑자전환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환율 상승에 따른 환차익일 뿐 영업환경은 더욱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결과 법정관리 또는 해외매각을 모색하는 것이 국내 에너지의 절반을 담당하고 있는 정유산업의 현주소인 것입니다. 국내석유산업은 조국근대화의 시발과 함께 국가경제의 기간산업 및 수입대체산업의 핵심으로 태동하여 현재 우리나라가 자동차, 조선, 철강,반도체 산업 등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는데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석유는 산업 및 국민 생활에 필수 불가결한 기초에너지원인 동시에 경제의 발전과 삶의 질 향상을 가져온 없어서는 안될 전략적 물자입니다. 앞으로도 우리 경제가 지속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주요 에너지원인 석유의 안정공급은 필수적 조건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석유라는 자원의 유한성과 경제적 대체재의 부재를 감안하면 석유문제는 시장경제 원리에 의한 접근보다는 생존 차원에서 보다 비중있게 다루어야 할 성격입니다. 이러한 점은 미국의 정책에서도 엿볼 수가 있습니다. 미국은 1999년에 채택된 국가안보전략보고서에서 “미국의 번영은 미국과 서로 무역을 하거나 석유나 천연가스와 같은 주요 자원을 공급하는 주요 지역들의 안정에 달려 있다”라고 지적한 바와 같이 경제와 에너지 안보를 불가분의 관계로 인식하는 시각을 갖고, 이를 대내외 정책에 반영하고 있습니다.
21세기가 지식 정보화 시대라 하더라도 현대문명은 결국 값싼 에너지의 대량 공급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번 이라크 전쟁을 통하여 재확인되었습니다. 이번 전쟁을 놓고 군사전략적 측면과 정치경제적 역학관계등 여러 관점에서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지만 미국 주도의 국제석유질서 재편 목적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기 때문입니다. 각국이 이해관계에 따라 참전과 반전으로 대립한 것도 석유자원의 확보와 상실이 해당국의 국가기본전략은 물론 국가경쟁력과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냉엄한 현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정작 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 국가로서 장기적인 대책이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둘러싼 정책과 비젼이 21세기에 국가의 경쟁력과 후손의 미래를 담보하는데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 지 의문입니다.
이라크전후 국제석유질서의 재편이 예상되는 즈음에 정부, 업계를 비롯한 관련기관은 이러한 국내외적인 현실을 직시하고 국익을 위하여 국내 석유산업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대책을 모색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내석유산업이 향후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선결 조건으로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현안 과제를 간략하게나마 언급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소비지정제주의가 정착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현행 5%로 되어있는 원유관세를 무관세화 해야 합니다. 원유에 대한 무관세는 해외 주요 선진국들이 대부분 채택하는 소비지정제주의 라는 정책방향에 전제가 되어 왔습니다. 즉 국제 석유제품시장은 원유시장에 비해 규모가 극히 작기 때문에 석유위기가 발생할 경우 원유에 비해 석유제품의 가격과 물량의 변동이 훨씬 심하므로 소요되는 석유를 자국내에서 정제 공급하는 소비지정제주의는 에너지 안보를 위한 정책수단입니다. 이를 위해서 원유는 무관세하는 반면 수입석유제품에는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는 것이 국제적인 사례이며, 2002년 8월 재경부 산하 한국조세연구원의 연구조사 결과에서도 원유와 석유제품간에 8%P의 관세차이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적정하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현재 원유와 석유제품간의 관세차이가 2%P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그 결과 정유사들은 가동율을 줄이는 한편 수입사들은 급속히 시장을 확대하고 있어 석유위기시 대응력 약화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가격인하를 유도하기 위한 경쟁원리 도입의 명분으로 정유사와 수입사간의 무한경쟁을 초래한다면 국내석유산업 전체의 경쟁력을 약화시켜 결국 국민에게 석유구입을 위해 높은 부담을 지우게 할 것입니다. 또한 경쟁원리를 도입하려면 국내에 시설과 고용을 유지하는 정유업계와 시설투자부담을 지지 않는 수입업자간에 공정한 경쟁이 될 수 있도록 국제적 사례에서 보듯이 경쟁규칙을 마련하고 경쟁을 시키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습니다. 원유관세를 무세화한다면 소비자 가격 인하와 국내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시켜 결국 세수 증대에도 기여를 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석유유통질서의 확립이 시급히 필요합니다. 작금의 석유유통시장은 세금탈루를 목적으로 한 유사석유제품이 기승을 부리고 있어서 정상 유류의 유통이 위축됨은 물론 정상 유류 사업자의 피해가 커지고 있습니다. 정부는 공권력을 바로 세워 법질서를 확립하고 차제에 관련 법규를 정비함으로써 법의 허점을 파고 들어 국민을 호도하는 사례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일반 대중이 유사휘발유에 대한 본질적 이해나 패해는 소홀한 채 단편적인 흥미위주로 접근하는 것이 아쉽고 안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유사휘발유 제조 및 유통업자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며, 급변하는 대외 환경변화에 대응키 위해 경쟁력 강화에 힘을 쏟아야 하는 석유산업 관련 당사자들의 에너지를 소모시키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피해는 국민 모두에게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공정하고 냉철한 기준으로 판단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안팎으로 어려운 환경에 직면한 정유업계 종사자 여러분들은 국가안보와 국민경제에 중요한 기간산업에서 일하고 있다는 긍지와 자부심으로 신록의 푸르름이 주는 희망과 용기를 가집시다. 머지 않아 시련이 지나고 정유산업은 건강하게 성장할 것으로 확신하는 바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