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칼럼
탄소 감축 과정에서 석유의 중요성이 더 커지는 이유
최지웅 연구원
(한국석유공사 스마트데이터센터 에너지정보팀)
기후변화 대응과 탄소 감축은 피할 수 없는 시대 흐름이다. 기후변화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라는 점에서 탄소를 감축하는 노력은 다른 정치, 경제, 사회 이슈의 중요성을 압도한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에서 자칫 석유와 가스 자원의 중요성이 감소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탄소 감축의 압력이 거세질수록, 그리고 탄소 중립의 장기 레이스에서 석유와 가스의 중요성은 더 커질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 탄소감축 과정에서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움직임이 나타날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석유와 가스의 쓰임은 필수 용도로 한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 시점에서 탄소를 줄이는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에너지를 덜 쓰는 것이다. 에너지 소비를 줄이면 탄소 배출량도 줄어든다. 그런데 석유는 압도적 효율을 가진 에너지원이다. 석유를 다른 에너지원으로 즉각 대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중기적으로 탄소 감축은 대체 에너지원이 아니라, 기존 에너지원의 소비 절감을 통해 이뤄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탄소중립’이란 간접적 개념보다 직접적 에너지 소비 감축을 통한 ‘탄소 배출 감소’의 개념이 더 강조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에너지 소비를 줄이자는 목소리는 전 세계로 확산될 것이다. 지금의 국제정세와 지정학도 에너지 소비를 줄일 것을 강요하고 있다. 미-중의 대립은 석유, 반도체 등의 주요 전략 상품 공급망을 블록화 함으로써 수급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다. 또한 러시아와 서방의 대립도 향후 석유, 가스의 원활한 공급을 저해할 것이다. 향후 미-중이 협력하고, 러시아와 서방이 화해하면서 과거와 같이 석유와 가스가 세계화된 시장에서 오로지 경제적 목적으로만 거래되었으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아지고 있다.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이미 유럽은 적극적인 에너지 소비 감축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EU 집행위원회는 회원국에 천연가스 소비를 15% 줄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개별 국가 차원에서도 적극적인 에너지 절약 캠페인이 추진되고 있다. 독일에서는 19도 이상의 난방 금지, 28도 이하의 냉방 금지를 실시하고 있다. 덴마크에서는 온수 샤워를 5분 이내로 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의 에펠탑의 조명은 지난 9월부터 조기 소등되고 있다. 새벽 1시에 꺼진 조명을 앞으로 밤 11시 45분 꺼지고 있는 것이다. 유럽 전체적으로 난방과 조명 제한, 온수 공급 중단 등 다양한 방법으로 에너지 소비 절감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에너지 절약 움직임은 전 세계로 확산될 필요가 있고 그럴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사실 유럽보다 우리가 더 해외 자원에 대한 의존도가 더 높다. 유가 상승이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더 크다. 우리나라는 올해 고유가 때문에 2008년 이후 처음으로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할 전망이다. 그 규모도 올해 10월 기준 356억 달러로 외환위기 이후 최대 규모다. 지금 한국에서도 에너지 절약이 최선의 경제 정책이면서 환경 정책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유럽과 한국이 별도의 시장에서 에너지를 구매하는 것이 아니다. 값싼 에너지의 시대가 저물어 갈수록 에너지 절약의 필요성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에너지 사용을 줄이려는 노력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석유 소비를 줄이기 위해 전기차를 늘리고 화력발전소를 줄이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에너지 절약을 하려고 해도 줄일 수 없는 석유 수요가 있다. 가령 수많은 가전제품의 구성 요소가 되는 플라스틱은 가전제품의 내구성을 개선하고 교체 주기를 늘려감으로써 소비를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인명을 다루는 의료 현장에서 사용되는 주사기와 의료용 장갑 등 의료기기의 소비를 줄이기는 어렵다. 전기차와 전철 등은 전기와 배터리가 있는 환경에서 구동할 수 있다. 그러나 군사용 차량과 무기는 전력 인프라가 붕괴된 상황에서도 가동이 가능해야 하므로 전기화가 불가능하다. 또 우리가 여행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해외여행을 줄일 수는 있다. 그러나 필수 인력과 물자의 교류를 위한 항공과 선박의 이용은 유지해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석유의 사용이 최소화되는 상황일수록 석유는 필수 분야의 사용으로 제한될 것이다. 그것이 바람직한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데 석유의 사용이 사회 안전, 필수 경제활동, 국가 안보를 유지하기 위한 소비로 제한되면 이때의 석유 공급 공백은 더욱 큰 충격이 될 수 있다. 지금처럼 비필수 분야에서 석유가 쓰이는 환경에서는 석유 수급이 악화됐을 때 비필수적 소비가 석유 수급 악화로 인한 충격을 완충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즉, 소비자의 고통 분담 정도에서 석유 수급 악화를 넘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석유 소비가 최소화되는 상황에서는 그런 완충 수요가 없다. 이때의 석유 공급 공백은 국가 필수 기능의 마비를 야기할 수 있다.
탄소 감축 시기에 석유가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새로운 에너지의 등장 속도와 기존 에너지의 퇴장 속도의 비대칭이 나타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에너지원 간 성장과 쇠퇴의 속도 차이에서 오는 충격을 가장 크게 받을 국가는 석유와 가스를 전량 수입하는 국가다. 지금 새로운 에너지에 대한 전망과 담론은 너무나 환상적이다. 신재생에너지에는 온갖 수식어가 붙는다. 또한 그것이 제시하는 스토리는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친환경’, ‘그린’, ‘저탄소’등의 수식은 엄격한 심사 없이 대중에게 어필한다. 새로운 에너지가 어느 정도 역할을 할지 판단하려면 그 에너지가 가진 숫자에 주목해야함에도 숫자에 대한 관심은 부족하다. 그래서 그것이 빠른 시간 안에 확대될 것이라는 기대를 형성한다. 문제는 이러한 기대가 석유개발 투자를 위축시킨다는 것이다. 새로운 에너지의 성장은 더딘데, 기존 석유와 가스는 퇴장을 종용받는 상황이 나타나는 것이다.
강원도 대관령에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풍력단지가 있다. 이 발전시설의 건설을 위해 2001년 양해각서가 체결되었는데, 실제 착공까지는 4년 이상의 시간이 소비됐다. 각종 인허가 취득의 어려움과 자금 조달 등의 문제로 준비 기간만 4년이 소비된 것이다. 이후 완공까지는 약 2년이 더 필요했다. 결국 최종 완공은 2006년 10월이었다. 사업 구상부터 완공까지 거의 6년이 걸린 것이다. 그렇게 해서 대관령에는 53기의 풍력 터빈이 설치되었고, 약 100MW의 발전 설비 용량을 갖추게 됐다. 여기서 6년이라는 숫자보다 100MW란 숫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00MW의 발전 설비는 원전 1기 설비 용량의 1/10 수준이다. 보통 원전 1기의 발전 설비 용량은 1,000MW 이상이다. 따라서 53기의 풍력 터빈을 갖춘 대관령 풍력단지를 10곳에 건설해야 원전 1기의 발전 설비 용량과 같아진다. 게다가 태양광, 풍력 등의 재생에너지 발전 시설은 그 발전 용량을 항상 100% 가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만 MW의 설비 용량이라도 바람이 불지 않거나, 햇빛이 없으면 발전량은 ‘0’이다. 즉, 재생에너지 시설은 같은 용량의 원자력 또는 화력 발전소 대비 가동률이 현저히 떨어진다. 그래서 대관령 풍력 단지와 같은 규모의 시설이 20곳에 건설돼도, 연간 기준 전력 생산량에서 원전 1기에 못 미치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재생에너지는 그 효율에 관계없이 에너지 믹스에서 일정 부분을 차지해야 한다. 환경적 이유도 있지만, 재생에너지는 석유나 가스처럼 그 에너지원을 해외에서 수입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에너지 자주성을 확립하는데도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속도다. 대관령 풍력 단지는 구상부터 계획까지 약 6년이 소요됐다. 지금도 대관령과 같은 사업의 적지를 찾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설령 찾아낸다 해도 대규모로 토지를 확보해 주변 민원과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추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요컨대 재생에너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요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석유개발 투자는 급속히 감소하고 있다. ESG와 Re100등의 영향으로 석유개발 사업도 사회적으로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신재생에너지의 환상적 스토리와 탄소중립의 당위는 지금 당장 석유와 가스가 필요한 현실을 외면하게 하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인지부조화는 극대화된다. 석유와 가스를 감정적으로 환영하지 않으면서 현실적으로 필요한 상황, 그리고 이로 인한 기존 에너지의 퇴장 속도와 새로운 에너지의 등장 속도의 비대칭은 향후 에너지 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상황은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원유를 100% 해외에 의존하는 국가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
지금의 고유가도 세계적으로 석유 소비가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2015년 이후 석유개발 투자가 급감했기 때문이다. 2020년 세계 석유 개발 투자는 15년래 최저치인 약 3,300억 달러에 머물렀다. 이는 2014년의 약 7,800억 달러에 비하면 절반도 되지 않는 규모다. 펜데믹에서 벗어난 2021년 이후 투자는 소폭 증가했지만, 여전히 2014년 대비해서는 절반 정도의 규모다.
석유개발 투자가 감소한다는 것은 향후 세계적으로 공급 가능한 석유가 감소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렇게 되면 산유국은 자국 수요를 우선으로 충당할 가능성이 높다. 석유 시장은 점점 판매자 위주로 돌아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유가 상승을 넘어 에너지 수입국의 석유 수급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 지금 당장은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긴축적 통화 정책이 수요를 강하게 억제하고 있어서 공급 부족이 강하게 체감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경기는 순환하는 것이고 미국의 금리 인상 기조가 약해지면서, 수요를 억제해왔던 요인들이 사라지면 석유 시장의 불확실성은 더욱 커질 수 있다. 따라서 국내외에서 자체적으로 원유를 확보하며 에너지 안보를 제고하는 노력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이 상황에서 일본의 움직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최근 일본의 석유 소비는 소폭의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해외 석유가스 개발 사업을 확대하며 자원 확보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일본 경제산업성이 2021년 11월 발표한 자료 따르면 2020년 일본 기업이 해외 사업을 통해 확보한 석유·가스 물량은 일 175만 배럴(boe/d)이다. 이는 일본이 그해 수입한 물량의 40.6%에 해당한다. 2010년에 이 비율이 23.5%였으니 일본은 지난 10년간 꾸준히 해외 석유사업을 확대해 온 것이다. 일본은 2030년까지 이 비율을 50% 이상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이처럼 일본은 원유 소비가 감소하는 상황에서도 석유와 가스 사업의 적극적 참여를 통해 에너지 안보를 제고하고 있다.
물론 석유 소비는 줄여가야 한다. 우리는 너무 많이 소비하고 있다. 그러나 자발적 다이어트와 외부 환경에 의한 굶주림이 다르듯, 소비 감축은 우리 스스로가 주도하는 환경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에너지 공급난 또는 오일쇼크와 같은 외부 충격에 의한 소비 감소는 그 피해도 크거니와 에너지 전환의 동력도 약화시킨다. 당장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은 전기료 인상이지, 탄소의 감축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탄소감축의 과정은 석유의 중요성이 작아지는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석유 소비가 필수 용도로 제한되면서 그 공급 변동의 충격이 더 커질 수 있는 시간이다. 이러한 점에서 국내 석유업계가 탁월한 생산, 가공 능력을 통해 협상력을 강화하고 공급 체인에서 역할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국내외에서 석유 탐사와 개발을 통해 자체적인 원유 확보 능력도 제고해야 한다.